愛蘭의 아픔 凍害를 넘어서
1992년 봄, 나는 父親의 소개로 난초를 알게 되어 종로거리, 서울대 입구 난 가게, 양재시장 등에서 춘란(春蘭)을 구매해 기르기 시작했다. 우연히 길거리 路上에서 사게 된 춘란에서 산반무늬와 노랑춘란 꽃이 피는 모습을 보고 난초의 다양한 변화에 이끌리고 매료되어 내 나이 서른 중반부터 지금까지 약 20년간 탐란산행(探蘭山行)과 난초를 가까이하는 취미활동을 하게 되었다.
1995년에 이르러서는 서울에서 춘란접근이 용이한 분당지역으로 이사를 하게 되어 난(蘭) 가게와 난 전시회를 더 자주 기웃거리게 되었고, 난 잡지 구독과 지인(知人)들의 경험을 통해 배워가며 베란다에는 난초 분수가 나날이 늘어갔다. 좋아 보이는 난초는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담을 끼쳤지만, 애지중지(愛之重之) 키우다 보니 무늬도 발전하고 그럴싸한 꽃도 피워내어 나를 더욱더 애란의 생활에 깊이 빠져들게 하였다.
난초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면서 조금 더 잘 배양해보고 싶은 욕심과 아파트 베란다의 배양한계를 느끼며 2000년 10월, 상태가 양호하고 발전되어가는 춘란 250분을 비닐하우스인 지상난실로 옮기는 결정을 고심 끝에 내렸다. 그리고 앞으로 더욱 잘 배양하여 아름다운 명품을 탄생시키려는 꿈을 가졌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던가. 2001년 1월 1일 영하 17도의 강추위는 애지중지(愛之重之) 가꾸던 난초들을 무참하게 동사(凍死)시키고 말았다. 오랜 세월 동안 즐거움과 기쁨으로 기르던 많은 난초를 한순간에 잃어버리게 된 상황 앞에서 나는 엄청난 충격과 아픔 앞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고 말로만 듣던 동해(凍害)의 피해가 내게 다가왔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이미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의 참담함을 실감하면서 이렇게 된 상황을 돌이켜보니, 하우스 배양에 대한 충분한 경험이 부족하고 강추위에 대한 준비가 미흡했던 난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난초를 잘 길러보겠다는 나의 섣부른 욕심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나 자신을 추스르며 일부라도 살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럼에도 나는 사랑과 열정으로 9년간 내 삶의 중심이 되었던 난초를 동해(凍害)로 떠나보내며 오랜 시간 눈물과 가슴앓이로 애란 생활에 대한 의욕이 상당 부분 상실되었고 아끼던 난초가 강추위에 노출되어 생명력을 잃어가는 모습이 떠오를 때면 가슴이 메여오고 울화가 치솟았다.
나는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가졌기에 당직근무를 자주 하였으며 동해를 입게 되었던 날 저녁에도 야간근무 중이기에 난실에 가지 못하였다. 당시에 강추위가 몰려올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듣고 걱정이 되었지만, 직장에서 출동대기를 해야 했고, 난초가 추위에 피해를 보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한 느낌에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채 새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다음날 노심초사 달려가 난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싸늘한 냉기에 적막감마저 들었다. 난초들은 까칠하게 원망이라도 하듯이 보였고 예상했던 대로 통통한 꽃망울이 뭉크러지고 신아들은 탈수현상을 나타냈으며 난분위에 난 석이 얼어서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피해를 보았다. 포기와 체념을 하면서도 제발 뒤 촉이나 벌브가 종자로 살아주길 간절히 빌었으나, 凍害의 결과를 알기 위해선 날씨가 풀리는 봄까지 기다려야 했으니 그 기다리는 시간의 애태움이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결국, 대부분의 난초는 여름철을 맞으며 고사(枯死)하었고 대주(大株)와 견딜만했던 몇몇 난초 역시 5년 동안 계속 신아(新芽)를 올리다가 멈추고 세력을 잃어가며 죽어갔다. 이를 지켜보면서 무책임하고 안일하게 대처해준 난실 주인이 한없이 원망스럽고 용서하기 어려웠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고 나 자신도 무지(無知)했던 결과였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추스르고 비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토록 좋아했던 난초를 잃어버린 슬픔과 상처에 다시는 난초를 대할 힘이 없었고 다시는 난초를 가꾸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일 년 동안 난초배양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나 1년 후, 나의 눈길과 발걸음은 다시 춘란을 향했고 내 정서와 감성에 잘 맞는 난초였기에 주변의 지인(知人)들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받으며 실패했던 애란 생활을 다시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러서는 여유를 찾게 되었다. 비록 뼈아픈 시간이었지만 이런 시행착오를 통해 앞으로는 더욱더 난초를 사랑하고 정성스럽게 가꾸어 훗날 부끄럽지 않은 蘭人으로 기억되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나는 현재 000난우회 회장과 00한국춘란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즐거움과 작은 행복으로 난초를 대할 수 있음에 감사와 보람을 느끼고 있으며, 기본원칙을 지키고 선배 난인들의 경험과 덕담(德談)을 경청하자는 겸손한 태도로 난을 가꾸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앞으로도 기다림의 자세로 항상 난초배양에 연구 노력하여 한국 춘란의 우수성(優受性)을 발굴하는 등 춘란의 아름다운 예(藝)를 가꾸어가는 영원한 애란 인(愛蘭人)이 되도록 다짐해본다.